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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21:27

운산 강당리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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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병인박해 때 17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교우촌
지역 충남 서산
병인박해 때 17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교우촌


병인박해 때 17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교우촌이다. 김선양 요셉을 비롯하여 17명이 홍주의 포교에게 동시에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 형벌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이들이 죽은 뒤 시체를 하나의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고 전해지고 있다.충청남도의 고풍 저수지 둑 남쪽, 서산 마애삼존불상으로 유명한 마을에 위치한 강당리 공소는 예전부터 옹기 마을로 이름난 곳으로 1889년에 공소가 설립되었지만 설립 당시 이미 교우 수가 120명에 달할 정도로 일찌감치 교우촌이 형성된 지역이다.
그런 만큼 박해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는데, 병인박해 당시 이 지역 교우 17명이 집단으로 순교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치명일기》 및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에 따르면 1866년 11월 병인박해 당시 강당리에서 김선양(1808~1866, 요셉)을 비롯하여 17명이 홍주의 포교에게 동시에 체포되어 홍주 관아로 끌려가 형벌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이들이 죽은 뒤 시체를 하나의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이 당한 교수형은 두껍고 큰 널판에는 구멍이 하나만 있었고 양쪽에서 두 명이 줄을 끌어 당겨 죽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17명이나 순교하였지만, 강당리 지역의 교우촌은 사라지지 않고 병인박해 이후 다시 형성되어 복음의 역사를 이어 나갔다. 이곳 신자들은 오랜 신앙의 뿌리를 지니고 있었다. 이웃한 미럭벌 공소와 이 두 곳의 신자들은 처음에 강당리에서 함께 공소를 치르다가 1894년에 이르러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미럭벌 공소가 설정되는 1894년에 이르러 강당리의 신자 수가 62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1919년에는 강당리 공소가 미럭벌 공소로 흡수 통합되었다. 이와 같이 미럭벌과 강당리 공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특히 두 곳 모두 옹기 마을로 이름난 곳이었는데, 일제 시대부터 강당리에는 점토가 모자라 미럭벌 등지에서 흙을 가져와야 했다고 한다. 1919년부터 강당리에서 공소를 치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옹기점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강당리는 미럭벌에서 4km 정도 떨어진 운산면 용현리에 있다. 즉 미럭벌 남서쪽에 새로 축조된 고풍 저수지 뚝을 지나 덕산으로 향하다가, 500m 지점의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가다 보면 강당리가 나온다. 이 강당리 초입에는 그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불이 있는데, 이곳은 아랫마을이며 유일한 신자인 김영옥 요아킴 씨가 근년에 별세하고 그 아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약 1km 더 올라가면 우측에 보원사터가 있고 이곳을 지나 위쪽에 있는 마을이 옹기점이 있던 윗마을이다. 이곳은 용현 자연 휴양림으로 근래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유원지가 형성되어 있다.

■  서산 마애삼존 불상(瑞山 磨崖三尊佛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 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 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 입상(사진 왼쪽)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윗말
 지리좌표  [강당리 윗말 앞] 북위 36°45′51.6″ 동경 126°36′23.6″
 연락처  운산 성당(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 419-6) (041) 664-9677 FAX (041) 664-9676
 홈페이지  없음
 미사시간  [운산 성당]
 평일 : (화목금) 오후 7:30 (수) 오전 10:00 (토) 오후 3:00
 주일 : 오전 6:00, 10:30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 IC를 나와 운산읍을 지나 남쪽으로 고풍저수지 뚝을 지나 덕산으로 향하
 다가, 500m 지점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남쪽으로 가서 서산 마애삼존불과 서산보원사지를 지나 윗말
 이 옹기점이 있던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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