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인

  1. 베르뇌 시므온

    베르뇌 시므온 ‘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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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랑페르 브르트니애르 유스토

    랑페르 브르트니애르 유스토 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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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도리 헨리코

    도리 헨리코 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듬해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부임하였다. 순교하는 날까지 운명을 함께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손골에서 지내는 동안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입국한 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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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볼리외 루도비코

    볼리외 루도비코 ‘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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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남종삼 요한

    남종삼 요한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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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전장운 요한

    전장운 요한 ‘승연’으로도 불렸던 전장운은 서울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지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 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최형, 임치화를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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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최형 베드로

    최형 베드로 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던 신학생들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崔方濟)가 그의 동생이다. 큰누이는 평생 동정이었으며 형 최수(崔燧)는 병인박해 때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목수 일과 묵주 제작,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고, 장 주교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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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정의배 마르코

    정의배 마르코 서울 창동(倉洞)에서 태어난 정의배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양 선교사의 순교 장면을 목격하고 감동하여 곧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고 주교가 입국한 뒤 서울 지역의 회장이 되어 20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일하였고, 1854년에는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2월 25일에 체포되었고, 3월 11일 푸르티에(Pourthié, 신요안(申妖安)) 신부, 프티니콜라 (Petitnicolas, 박덕노(朴德老)) 신부, 그리고 우세영(禹世英)과 함께 새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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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우세영 알렉시오

    우세영 알렉시오 ‘세필’로도 불렸던 우세영은 황해도 서흥(瑞興) 향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 요한이라는 회장의 권면으로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가, 정의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장(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부모의 반대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 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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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다블뤼 안토니오

    다블뤼 안토니오 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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