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생가터

by 관리자 posted Feb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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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 신부님이 태어 나신 곳
지역 충남 청양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최양업 토마 신부님이 태어 나신 곳


청양 다락골 줄무덤에 못 미쳐 약 1km 떨어진 곳에 새터[新垈]라는 마을이 있다. 바로 이곳이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생가터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태어난 곳이다. 이곳은 최인주(崔仁柱)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지어 정착한 마을이며 결혼하여 삼 형제를 두었는데 막내 아들이 1984년 5월 6일 시성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며 최경환의 장남이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다.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다락골의 본 이름은 달안골[月內洞]이었으며, 혹은 다래골로도 표기되는 곳으로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오서산(790m)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 집안이 교우촌으로 건립한 곳은 정확히 말하면 다락골 중심에서 오른쪽으로 낮은 산구비를 돌아 500∼700m 되는 곳으로, 이곳은 그 후 새터라고 불리어 왔다.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오던 집안에서 태어난 최경환은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의 손녀인 이성례(李聖禮, 1801~1840, 마리아)와 결혼하여 최양업 신부를 낳았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 이 멜라니아를 고모로 둔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로 인하여,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와 외 6촌간이 되며, 김대건 신부의 입장에서 보면 최양업 신부가 진외 6촌이 된다.
최경환 성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성인이 장가를 들고 사흘 만에 재행을 가니 처가 동네 교우 여인들이 몰려와 “구교집 서방님이니 교리를 듣자”며 신랑을 달아 먹으려 했을 때 사실 교리에 대하여 밝지 못한 최경환 성인은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수덕서 《칠극대전(七克大全)》을 며칠 밤을 새워 다 외우고 나니 교리에 밝아져 강론을 잘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던 최씨 문중은 미신이 성행하던 이곳에서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곳을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과 강원도 금성과 경기도 부평 등 지방을 전전하다가 최양업의 나이 만 17살이 되던 1838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을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 《칠극(七克)》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저자는 스페인 출신의 예수회 신부 판토하(D. Pantoja,龐迪我, 1571∼1618)다. 죄악의 근원이 되는 일곱 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 가지 덕행을 다룬 일종의 수덕서(修德書)다. 이 책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의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함께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연구되었고, 남인 학자들을 천주교에 귀의케 하는 데 기여한 책 중의 하나다. 즉 이익(李瀷, 1681∼1763)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 책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곧 유학의 극기설(克己說)과 한가지라고 전제한 다음, 죄악의 뿌리가 되는 탐욕, 오만, 음탕, 나태, 질투, 분노, 색과 더불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덕행으로 은혜, 겸손, 절제, 정절, 근면, 관용, 인내의 일곱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  순교자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5∼1839)
최경환은 충청도 홍주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내에 성소가 더 많이 증가하도록 빌어 주소서.

◆ 증거지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   <하느님의 종>
우리나라 제 2대 방인 사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다락골 출생,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 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되었다.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며 사목활동 12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 하였다. 19통의 라틴어 서한 <한국 순교자전> 을 번역 교황청에 올려 가경자가 되게 했고, <성교요리 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교리 문답서나 기도서를 간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초대 성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 정신, 2대 최 신부에게서는 땀의 순교 정신을 배울 수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지리좌표  [생가 터] 북위 36°26′34.0″ 동경 126°42′10.9″
 연락처  다락골 줄무덤 성당 (041) 943-8123 FAX (041) 943-8124
 홈페이지  다락골 줄무덤 성지 http://www.daracgol.or.kr/
 미사시간  다락골 줄무덤 성지에 사전에 연락하면 순례자들 편의에 맞추어 미사 시간을 정함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광천IC에서 청양군 방면 96번 국도로 진행하다 옥계 3거리에서 화성/보령
 방면으로 약 3분오면 이정표가 있다. 목포 쪽에서 올 경우 대천IC에서 공주/청양 방면으로 약 30분 진행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