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지

대전교구성지 자료출처는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http://paxkorea.kr)입니다. 한국 전체 성지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013.02.27 20:46

해미 읍성

조회 수 268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명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지역 충남 서산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처형한 해미 진영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兵營)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은 1790년대로부터 100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조선왕조의 군사적 요충지 진영(鎭營)에는 중앙에서 3품의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해미의 영장은 조선 중기 이후, 3품 벼슬의 무관(영장)이 별도로 파견되어 담당한 것이 아니라, 종6품의 해미 현감이 겸임을 한 것으로, 해미 진영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하며 홍주 영장(종3품)의 지휘를 받아, 서해안 일대의 고을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신자들 중의 지체가 높은 사대부 출신들은 모두 상급 기관인 홍주 영장 및 충청 감사가 있는 공주로 이송하고, 신분이 낮은 서민들만 자의적으로 대량 처단한 것 같다.  

  
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 곳이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성내에 있던 옥터인데 여기에서 많은 교우들이 옥사 또는 교수형을 당하였다. 해미의 첫 순교자는 1797년의 정사박해로 체포되어 1800년에 순교한 인언민(印彦敏, 1737~1800, 마르티노)과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이다.
이어 1814년에는 김진후(金震厚, 1739~1814, 비오)가 해미에서 옥사로 순교했으며, 그 외에도 1811년∼1839년의 중기 박해 기간 동안 민 베드로 첨지( ?~1839) 등 9명이 해미에서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866년 이후로 진행된 병인박해 때에는 모두 122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해미에서 탄생하였다. 이는 순교록에 나오는 57명, 관변 기록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에 나오는 70명 중에서 중복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자 5명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처럼 모든 기록을 통해 성명이나 세례명 중 적어도 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해미의 순교자는 132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 47명 이상의 수를 더하면, 기록으로 확인되는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총수는 179명 이상이 된다.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만을 통해 볼 때, 박해기의 해미 순교자 67명 중에는 교수형으로 순교한 33명의 경우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참수와 옥사가 각각 5명, 병사가 4명, 생매장이 3명, 그리고 장사가 3명, 미상이 14명으로 나타난다.

■ 해미 읍성의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 감옥 터와 호야나무
높이 5m 길이 1,800m의 석성으로 옹벽을 두른 해미 진영 안에는 동헌 동남쪽 1,800평 대지 위에 내옥, 외옥으로 구분되던 감옥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감옥은 높은 담으로 둘러쌓은 울안에 있었다. 바닥에 멍석을 깔아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말할 수 없이 더워 한여름 매 맞은 상처는 곪기 일쑤였다. 고문과 굶주림과 갈증과 질병으로 순교자들의 몸이 스러져 가던 감옥은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 다시 복원하였다. 그 감옥 터 옆에 있는 호야나무는 지금도 묶어 매달고 몽둥이로 치면서 고문하던 흔적으로 오늘도 이 나무의 묵은 가지는 녹슨 철사 줄에 움푹 패이도록 옛님들의 아픔을 살갗에 두르고 있다.


병인박해 때 이 감옥 사정을 목격한 이주필(李周弼)씨는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성 중앙에 담을 길반이나 넘도록 쌓아올린 3간 와가가 있으니 그것이 옥이다. 그 속에 30-40명 가량이 갇혀 있었다. 그 담 밖에 큰 고목이 하나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교우들의 목을 옭아매여 죽였다.
그 옆에 또 바깥옥이 있는데 역시 3간 와가이다. 그 안에는 십자패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는데 문을 열어 놓아도 도망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천주학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서 북쪽 산 밑에 10여간 되는 와가가 관아이고 여기서 영장이 정사를 다스렸고, 그 우편 아래로 또 큰 와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객사였다.
특히 당시 토포병방(討捕兵房)이던 박영완이란 자는 살기가 등등하여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박영완은 심지에 불을 붙여갖고 죽은 사람마다 눈에다 대어보고 아직 덜 죽은 사람을 발견하면 막 때려 죽여 버렸다. 박영완은 얼마 후에 홍주로 잡혀가서 맞아죽고 자손없이 절손으로 끝을 맺었다. 외교인들까지 모두 천벌이라고 말했다."

◆ 관아 터와 장터 길


진영장이 호령하던 옛 동헌과 그 옆자리에 아문과 호서좌영의 옛 모습이 복원되어 있고 뜨락에 있었을 법한 노송 여섯 그루가 당시 호령소리, 곤장 치는 소리, 비명 소리를 이파리마다 묻혀 놓은 듯 그 터에 서 있다. 관아 터로 부터 남서쪽으로 헐려진 옛 집터 사이사이에 질퍼덕한 길이 있다. 옛 저자길이다. 옛 님들이 저주의 욕설을 온몸에 묻혀가며 형장으로 호송되던 길이다.

■ 해미 성지 조성 과정

해미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1935년 당시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바로(P. Barraux, 范)신부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그는 해미의 이주필(李周弼)과 이병준(李秉俊), 도장리의 박승익(朴承益), 조산리의 임인필(任仁弼) 등의 증언에 따라 해미면 조산리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와 묵주, 십자가 등을 수습하고 서산군 음양면 상홍리 공소(현 서산 동문동 본당 뒷산)에 안장하였다.

조산리 유해 발굴
그리고 이를 기념하여 국판 40면의 소책자인 《해미순교자약사(海美殉敎者略史)》를 간행하였다. 그 후 1955년 4월에 서산 본당의 신자들이 순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56년 3월에는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와 서산 본당의 신균식(申均植, 도미니코) 신부가 옛 해미 감옥터와 형구로 사용되었던 돌다리를 찾았다. 돌다리는 6월에 서산 본당으로 옮겨 보관되었다.  

읍성 내 공소 신축과 순교 기념탑 제막식
이어 1957년에는 해미읍성 안에 공소 건물을 마련하였고, 1962년에는 해미읍성 안 옛 감옥이었던 호야나무 옆의 순교 성지를 매입한 뒤 1966년에 공소 강당을 신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75년 10월 대전교구에서는 ‘순교복자 79위 시복 50주년’을 기념하여 해미면 조산리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고 대전교구장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의 집전으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념탑 앞에 세운 화강석 제대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친인 남연군(南延君) 묘의 상석(床石)을 기증받아 다듬어 만든 것이다.

상홍리 유해를 해미로 이장
한편 정부에서는 사적지 보존을 위해 1973년 해미읍성을 사적 116호로 지정하고 읍성 일대의 복원 작업을 추진하여, 1981년 해미 공소 강당이 철거되었다. 교회측에서도 읍성 안팎의 순교 성지를 보존하기 위해 1982년 읍성 내 감옥터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고, 1984년에는 순교자들의 생매장터를 매입하였으며 1985년 4월에는 성지 관리를 위해 해미 본당을 설립하였다.
본당에서는 6월부터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를 설치하고 성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86년 9월에는 서산 본당에 보관 중이던 돌다리를 원 위치인 해미 진영 서문 밖으로 옮기고 1989년에는 돌다리 옆에 순교 현양비를 건립하였으며, 1995년 9월에는 옛 상홍리 공소에 안장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 성지로 이장하였다.

현양 협의회의 성역화 사업
이와 함께 해미 순교 선열 현양 협의회에서는 순교 성지 매입을 위한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1998년에는 해미읍성 주위의 부지 약 7천 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 본당은 성지에서 떨어져 있어 순례객들의 미사 봉헌과 성지 관리가 어려웠기에, 해미 본당의 안상길(安相吉, 사도 요한) 신부는 성지 안에 성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2000년 8월에 기공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듬해 1월 성지 전담 사제로 부임하였다.
2003년 6월에 완공된 무명 순교자 기념 성당은 200평 규모의 대성당과 50평 규모의 소성당을 갖추고 있으며, 성당 뒤쪽에 지름 15m의 대형 묘지 모양의 유해 참배실을 마련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  여전히 식지 않고 (해미에서)  <김영수> ▒

         내포벌의 하늘이
         끝없이 쪽빛으로 빛나는 것은
         땅에다 뿌린 피들 있었음이요
         내 아직도 꿈을 놓지 않았음입니다
         결코 늙지 않는 햇살 속에서
         약속 푸르게 익어 있는 노래 들으며
         땅과 하늘 사이에서
         슬픔으로 설렐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에는 기도 품은 죄 있음입니다
        내 속을 돌고 있는 밤의 안개는
        자리를 조금씩 옮길 때마다
        한 줌씩의 새벽을 남기면서
        가장 깊은 슬픔의 샘에 닿아
        얼굴 씻은 물소리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 어린 기도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해미를 흐르는 바람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습니다

■ 순교자

◆ 인언민 마르티노(1737∼1800년)  <하느님의 종 125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황사영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해미 옥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기 시작다가 그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무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난폭하였으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어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 김진후 비오 (1739∼1814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면천의 솔뫼에서 태어난 김진후 비오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요 1816년에 순교한 김종한 안드레아의 부친이다.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운조’(運祚)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맏아들이 이존창으로 부터 교리를 전해 듣고는 이를 형제들에게 전하면서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가량 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처음에는 천주교 교리에 무관심했으나 자식들의 노력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1791년과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를 뜻하는 말을 하고는 유배형을 받았지만, 1805년에 다시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10년간 모범적인 인내심으로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냈으나, 결국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지리좌표  [진남문 입구] 북위 36°42′68.7″ 동경 126°32′84.5″
 연락처  해미 성지 관리소 사무실 (041) 688-3188, 688-4886 FAX (041) 688-9039
 홈페이지  해미 성지 http://www.haemi.or.kr
 미사시간  [해미 성지]
 평일 및 주일 : 오전 11:00 (단 월요일 미사 없음)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도로 해미IC에서 내려서면 곧 해미 읍성에 이른다.

  1. 상홍리 공소 (가재 공소)

    Date2013.03.01 By관리자 Views2263
    Read More
  2. 상홍리 순교자 묘

    Date2013.03.01 By관리자 Views1943
    Read More
  3. 운산 강당리 교우촌

    Date2013.02.27 By관리자 Views1862
    Read More
  4. 운산 미럭벌 교우촌

    Date2013.02.27 By관리자 Views2217
    Read More
  5. 해미 서문 밖 순교지

    Date2013.02.27 By관리자 Views2434
    Read More
  6. 해미 성지

    Date2013.02.27 By관리자 Views3109
    Read More
  7. 해미 읍성

    Date2013.02.27 By관리자 Views2685
    Read More
  8. 해미 한티 공소

    Date2013.02.25 By관리자 Views1977
    Read More
  9.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Date2013.02.25 By관리자 Views3061
    Read More
  10. 아산 공세리 성당

    Date2013.02.25 By관리자 Views3612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
Invalid XML in widget co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