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인

2012.05.15 16:51

유소사 체칠리아

조회 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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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과부
순교일 1839-11-23
관련성지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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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사 체칠리아

 

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丁哲祥)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9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1. 김제준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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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박봉손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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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금주 페르페투아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홍금주는 10세 때 입교하였고, 15세 때 외교인과 혼인한 뒤 냉담하였다. 그러나 남편을 잃은 뒤 교우들의 권면으로 신앙을 다시 찾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살면서 가장 천한 일을 맡아 하고 또 병약자들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홍금주는 최 필립보라는 교우의 집에 있다가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옥살이 중 서너 차례 염병에 걸려 고생하였으나 조금이라도 낫기만 하면 다른 교우들의 상처를 닦아 주는 등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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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흡 베드로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뒤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서른 살쯤 교우인 손소벽(孫小碧)과 혼인한 뒤로는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 때부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하였고,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崔榮伊)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趙信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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