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인

  1.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경환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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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앵베르 라우렌시오

    앵베르 라우렌시오 한국 이름은 범세형(范世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며 주교로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소(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도 못한 채 병사하자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5월 주교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말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다. 그의 입국으로 조선교구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나(모방), 정(샤스탕) 두 신부와 더불어 교구 설정 6년, 교회 설립 53년 만에 비로소 선교 체제를 갖추었으며, 1839년 초 신자수는 9천 명을 넘게 되었다. 또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도 뜻을 두어 정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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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모방 베드로

    모방 베드로 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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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샤스탕 야고보

    샤스탕 야고보 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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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순교 당시 정3품 당상 역관(當上譯官)의 높은 벼슬에 있었던 유진길은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특히 철학과 종교 문제에 관심을 갖고 10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하였으나 진리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구해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천주교 진리를 터득하고 곧 입교하였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유진길은 북경 교회와 연락을 담당하며 8차례에 걸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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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허계임 막달레나

    허계임 막달레나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태어난 허계임은 시누이 이매임(李梅任)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정희(李貞喜)와 영희(英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남명혁(南明赫)과 이광헌(李光獻)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金成任),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허계임은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여러 차례의 형문을 당하였으나 다 이겨 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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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남이관은 18세 때 교우인 조증이(趙曾伊)와 혼인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그는 경상도 단성(丹城)으로 귀양갔다가 30년 만인 1832년에 풀려 나와 이천(利川)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다. 그 뒤 상경하여 처가의 인척인 정하상(丁夏祥)의 신부 영입 운동을 도와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를 입국시키고, 그에게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뒤 회장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처가가 있는 이천으로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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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김 율리에타

    김 율리에타 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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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전경협 아가타

    전경협 아가타 동정 순교자인 전경협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대궐로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그 뒤 평소 친교가 있던 궁녀 박희순(朴喜順)을 따라 입교하였으며, 박희순이 신앙 생활을 위하여 궁을 나오게 되자 그도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신앙 생활에 전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포졸들의 습격으로 숨어 있던 박희순, 박 큰아기 등과 함께 체포된 전경협은 궁녀였다는 이유로 포청과 형조에서 더욱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참아 냈다. 이 때 조그만 관직을 잃을까 두려워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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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조신철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 ‘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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