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홍리 순교자 묘

by 관리자 posted Mar 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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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병인박해로 인해 돌아가신 해미 생매장 순교자 유해를 모셨던 곳
지역 충남 서산
병인박해로 인해 돌아가신 해미 생매장 순교자 유해를 모셨던 곳


충남 서산시 음암면에 위치한 상홍리 병인년 순교자 묘소는 병인박해로 인해 돌아가신 생매장 순교자들의 유해를 해미에서 이곳으로 안장했던 묘소다.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던 유해는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인 현 해미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병인박해 때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李周弼), 이병준(李秉俊), 임인필(任仁弼), 박승익(朴承益)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Barraux, 范, 생몰 1903~1946, 재임 1932.7.~1946.) 신부가 생매장지 일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1995년 9월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인 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던 해미읍성 서문 밖 사형터는 병인박해 때에는 주거 인접 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수십 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웅덩이)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 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하여 동리 사람들에게 ‘죄인 둠벙’이라 불리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이라 불린다.
또 다른 순교터인 여숫골은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박해 때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혔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는 바로 해미 조산리 진둠벙과 여숫골에서 생매장 당한 위대한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모셨던 곳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범 베드로 신부는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돼 있던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고증에 따라 3개소에서 발굴 수습해 상홍리 순교자 묘역(1995년 해미성지로 원상 복구)에 이장하였다. 비록 유해 대부분은 해미 성지 순교탑 아래 이장되었으나 상홍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 두고 있는 것이다.


◆ 해미 순교자 유해 발굴과 상홍리 순교자 묘역 조성 내력

서산 본당 제4대 바로(P. Barraux, 范 베드로, 1932.7~1946 재임) 신부는 병인년 해미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증인들의 증거에 의하여 모든 사정을 조사한 후 1935년 해미 조산리에서 치명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병오년(1906) 큰 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 무덤의 형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증인들의 증언으로 발굴한 결과 유해를 많이 얻게 되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의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없이 몇 십명이 되나, 수습한 유해는 10여 명 가량밖에 안된다.
유해를 발굴 수습한 후 1935년 4월 1일 대곡리 공소에서 1박하였고, 4월 2일 상여편으로 만장 100여 장을 앞세워 해미읍성에서 음암면 유계리와 일곱거리를 거쳐 음암면 상홍리 가잿골(당시 본당 소재지) 백씨 문중과 임씨 문중의 최상단에 안치하였다. 당시는 일제 치하였기 때문에 묘지 설치 허가가 없이는 이장할 수 없으므로, 사설 묘지 허가를 받은 문중 묘역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당시 조성한 분묘대로 유지해 오다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로 백낙관(시몬)씨가 1965년 서독 방문시 서독 파견 광부와 간호원의 협찬과 본인의 200만 원 희사금으로 오늘과 같은 순교자 묘역을 조성하였다. 순교자 묘 뒤의 십자가 순교탑과 '병인년 해미 순교자 묘' 비석은 1955년 신균식(도미니코) 신부가 건립하였다.

◆ 상홍리 '병인년 해미 순교자 묘' 발굴과 해미로의 이장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산 105번지의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셔져 있던 '병인박해 해미 순교자 묘'는 1995년 9월 18일에 파묘 및 순교자 유해를 원래 치명하셨던 해미로 옮기는 이장식이 있었다. 교구 사법부 대표 윤인구 신부를 비롯하여 다섯분의 신부와 각 본당 수녀들 10여 명, 해당 본당 회장단과 상홍리 공소 교우 등 30여 명이 참관하였다.
아침 7시 15분쯤 파묘식을 거행하고, 포크레인으로 봉분을 파헤친 후 수작업으로 유해를 찾아 들어갔다. 형체가 분명한 약 50여 개의 뼈와 형체가 불분명한 50여 개의 뼈를 추려낼 수 있었고, 약 200여 개의 치아를 따로 모을 수 있었다. 9월 19일 9시 40분경 교구 대표로 총대리 김병재 신부가 도착하여 파묘 경과를 보고받고 최종 확인을 하였다.
유골은 세 개의 자기 항아리에 모셨으며, 그 중 하나의 항아리에는 진토만을 모셨다. 유해 가운데 형체가 분명한 뼈는 화학 처리하도록 해미 본당으로 직접 모시고, 불분명한 뼈는 즉시 약 200m 떨어진 상홍리 공소 강당으로 모셔 교우들이 교대로 참배하였다. 그런다음 오전 10시에 서산 동문 본당으로 봉송하여 신자들이 철야로 참배한후, 다음 날인 20일 오전 9시 30분경 이원무 신부가 본당 회장과 함께 유해를 해미 성지로 모시게 되었다.
파묘 장소에는 여러 부장품을 넣은 50cm 높이의 보통 옹기 그릇 하나와 진토를 담은 자기 항아리 하나를 묘셨다. 부장품은 대형 나무 묵주 하나, 25cm 높이의 성모상 하나, 10cm 정도의 예수 그리스도상 하나, 그리고 '상홍리 순교자 묘역 조성까지의 내력'이란 제하의 글을 붓글씨로 쓴 전지 규격의 창호지를 담은 비닐 주머니 등이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지리좌표  [묘소 앞] 북위 36°47′53.7″ 동경 126°30′26.7″ 
 연락처  서산 동문 성당(충남 서산시 동문동 665-3) (041) 669-1002 FAX (041) 669-1009
 상홍리 공소 (충남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2구 159-2) 공소회장 (041) 663-5214
 홈페이지  서산 동문 성당 http://dm1004.or.kr 
 미사시간  [서산 동문 성당]
 평일 : (월) 오전 6:00 (화) 오후 7:00 (수) 오전 10:00, 오후 7:00 (목금) 오전 6:00, 10:00
 (토) 오전 6:00, 오후 3:00, 5:00 / (주일) 오전 6:00, 9:00, 10:30, 오후 7:00
 [상홍리 공소] 첫째, 셋째 주일 오후 2:00 
 교통편

 [승용차] 서해안 고속국도 서산IC에서 서산 방면 32번 국도로 가다 음암 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면사
 무소 방면 구 도로로 나가 서산 방면으로 간다. 약 1km 가서 언덕길 우측에 코카콜라 서산 대리점에 주

 차하고 이 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약 200m 올라가면 묘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