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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15:18

황무실 교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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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키고 두 분의 선교사가 선종한 내포지방 교우촌
지역 충남 예산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키고 두 분의 선교사가 선종한 내포지방 교우촌


충청도 내포 지방은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면천의 황무실 교우촌도 역시 오래된 교우촌으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적이 있는 순교자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은 이곳 황무실 출신이다.
지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황무실 교우촌의 순교자는 박해 시에 순교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한 9명 외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무명 순교자로서 내포 지방 산야에 잠들고 있다. 다만 그곳을 사목 중심지로 해서 활동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 있다.
알려진 황무실 출신 순교자로는 병인년(1866년) 공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병인년 해미에서 순교한 신 베드로(85세), 신 아우구스티노(23세), 정묘년(1867년) 해미에서 순교한 표 안드레아(36세), 무진년(1868년) 5월 30일 해미에서 생매장 당한 방 마리아(35세)와 역시 해미에서 순교한 그의 시어머니 박 바르바라(74세), 같은 해 공주에서 순교한 조군서 등이 있다.


황무실은 매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와 랑드르(Landre, 洪, 1828~1863, 요한) 신부가 전교 도중 1857년 12월 20일과 1863년 9월 15일에 각각 병사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던 곳이다. 이 매스트르 신부는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 1820?~1837,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스승이었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매스트르 신부는 다음해(1853년)에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1856년)까지 임시 감목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이후 새로운 사목지인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황무실에 묻혔다.
매스트르 신부가 1857년에 선종하고, 1861년 랑드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하부 내포(충청도 해안) 지역을 담당하게 되고, 랑드르 신부는 이후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황무실에 있던 랑드르 신부의 무덤도 매스트로 신부의 무덤과 함께 1970년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이후 성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1865년 조선에 파견되어 내포에 머물면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황무실을 사목 근거지로 하고 전교하였다. 위앵 신부의 1865년 10월 19일(2통), 10월 29일, 12월 12일 서한이 황무실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아 황무실이 위앵 신부의 사목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  순교자

◆ 성 민 루가 위앵(Huin) 신부 (1836∼1866)
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 성 위앵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성직자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이보현 프란치스코 (1773∼1800년)  <하느님의 종 125위>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는 충청도 덕산 황무실(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부유한 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난폭하였으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어 해미 관장에게 이송되었다. 다음날 아침, 프란치스코는 장터로 끌려 나가 혹독하게 매를 맞았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망나니들은 그를 넘어뜨린 후 몽둥이로 불두덩을 짓찧어 끝장을 냈다. 그때가 1800년 1월 9(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 매스트르(Maistre, Joseph Ambroise, 李)(1808∼1857) 신부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영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2구
 지리좌표  [황무실] 북위 36°46′78.7" 동경 126°44′33.6"
 연락처  신합덕 성당(당진군 합덕읍 운산리 253) (041) 362-5947 FAX (041) 363-5947
 홈페이지  없음
 미사시간  [신합덕 성당]
 평일 : (월) 오전 6:00, (화-금) 오후 7:30, (수)오전 10:00 (토) 오후 4:00, 7:30
 주일 : 오전 6:00, 9:00, 10:30, 오후 7:30 
 교통편  [승용차] 합덕읍에서 서쪽 고덕면 방면 622번 도로를 따라 약 2.5km 가면 호음리2구 경로당 삼거리
 전 군계기사식당 3거리에서 좌측 비포장 도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호음재뜸길) 약 500
 가서 좌회전하여 200앞에 왼쪽에 목장이 있고 오른쪽 개울을 중심으로 왼쪽 산비탈 밭이 선교사묘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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