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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5 15:25

예산 간양리 본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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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으로 내포 지역의 첫 본당터
지역 충남 예산
순교자를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으로 내포 지역의 첫 본당터


간양골은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에 보면 순교자 김동, 박 회장, 신여석 등을 배출한 박해시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아늑한 산골짜기면서도 가까운 신례원 창말 포구(浦口)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水路) 교통과 연결되고, 산길을 통해 충청도 내륙과 연결되었던 위치적 조건 때문에 훗날 내포 지역에 초대 본당이 건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순교자가 적었던 이유는 포졸들이 들이닥치더라도 재빨리 사방으로 피신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간양리 본당터는 신례원 창말 포구(浦口)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水路) 교통과 연결되고, 고개 넘어 수철리(드른리)와 소통하면서 산길을 통해 충청도 내륙과 연결되는 위치이다.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조선교구 전체를 구분한 8개의 본당 구역 중 5개가 충청도에 있었으며 2개는 내포에 있었는데, 다블뤼 주교가 관할한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한 ‘상내포 본당’과 랑드르 신부가 관할한 충청도 서부 지역의 ‘하내포 본당’이었다. 간양리는 ‘상내포 본당’에 속했던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내포의 두 본당은 1866~1871년에 몰아닥친 병인박해로 인해 풍비박산 나서 해체되고 말았다.



1886년 프랑스와의 수교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회는 1890년 신앙의 중심지 내포 지방에 두 개의 본당을 설립한다. 블랑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신부는 20명의 선교사 중 1889년 6월 21일에 입국한 퀴클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신부를 양촌(陽村, 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본당 주임 신부로, 같은 해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를 간양골(당시 신창현 소속, 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하였다.
당시 간양골 본당의 관할 구역은 신창, 온양, 아산 공세리, 천안, 풍세, 보산원, 직산, 목천, 진천, 백곡, 안성, 평택, 안중 등 충청도 북동부와 경기로 남부 지역이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0년 4월에 간양골에 도착하여 5년간 몸에 큰 병이 들만큼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894년에 몰아닥친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인해 내포교회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퀴클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 주교의 명에 따라 같이 서울로 피신하였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병이 깊어져서 본국 프랑스로 귀환 치료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이로써 간양골 본당은 설립된 지 5년만에 폐지되어 양촌 본당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간양골 본당은 양촌(→ 합덕, 1898년 본당 위치 옮김) 본당의 공소가 되었다.

◆ 간양리 공소 시대(1894~1949)
한때 본당이었던 간양골 공소는 이후에도 주변의 다른 공소들과 더불어 순교 신앙의 전통을 간직한 채 충실한 신앙의 보금자리 역할을 하였다.
1922년 페랭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는 ‘두곡리, 수철리, 봉소리, 구룡리와 더불어 간양리 공소가 아이들의 영세 문답 교육을 잘 하고 있는 공소’로 나온다. 1928년 예산 본당 초대 구천우 신부의 연말 보고서에도 ‘대치리와 간양리의 교우들은 그들이 모두 법대로 수계한다는 점에서 지시에 대한 순명에 있어서 다른 공소들보다 아주 낫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대개 수철리의 신자들이 고개를 넘어 간양리 공소로 와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렸다.
이렇게 충실한 신앙이 보금자리였던 간양리 공소가 폐지된 것은 해방 후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6.25) 때문이었다. 해방 후 간양리와 인근 도고의 신유리(느랭이), 대술 궐곡리(고새울) 등지에는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가 많았다.
그래서 간양리와 수철리는 한국전쟁 때 공산당(빨치산) 세력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어서 간양리 공소 건물은 이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여, 군경의 공격 목표가 되기도 하였고 미군기의 폭격도 당했던 곳이었다. 간양리 공소 건물은 점점 파괴되어 결국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간양골 입구 마을에 사는 신자들 집에서 예절이나 미사를 드리면서 간양리 공소의 명맥을 이어갔으나, 이 지역 공소 신앙의 중심지는 수철리 공소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간양리 공소는 점점 약화되다가 1962년에 공소 자체가 신례원 창소리로 옮겨졌고, 1977년 신례원 본당으로 승격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므로 신례원 본당의 뿌리는 간양리 본당(공소)인 것이다.

◆ 수철리 공소


간양리 공소와 수철리 공소는 고개 하나 넘어 긴밀하게 연락하며 마치 한 공소처럼 생활하였다. 1900년대 초 퀴클리에 신부가 작성한 공소 통계 자료에 ‘드른리’라고 나오는 곳이 수철리로 보인다. 1901년 연말 보고서에서 퀴클리에 신부가 간양골 산뒤 ‘뒤란 공소’에 있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뒤란 공소’는 수철리의 별칭임이 분명하다.
황석두(루가) 순교 성인의 손자인 황만호는 부친 때 박해를 피해 충북 연풍에서 이주해 온 아산 만보골, 숫골에 살다가, 일제 강점기에 (청년 시절에) 도고 신유리(느랭이)를 거쳐 간양골로 이주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거기서 밀양 박씨 부인을 맞아 결혼하여 살다가 한국전쟁 후 간양리 공소 강당이 폐지된 후 수철리로 이주하였다. 황만호와 그의 아들 황기완은 대를 이어 공소 회장직을 수행하며 순교 성인의 후손으로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960년 황기완의 주도로 수철리 ‘새터’에 15명의 목조 회칠흙벽 함석 지붕의 강당을 신축하였다. 수철리 공소는 인근 간양리, 궐곡리(고새울) 공소, 송석리(수골) 공소 등을 아우르는 중심지가 되었다. 판공 때면 사방의 공소들에서 신자들이 수철리로 모여들어 미사를 드렸다. 그러다가 1977년에 신례원 본당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직도 수철리에는 황기완의 아들 황해진 (전)공소 회장을 비롯하여 20여명의 신자들이 순교 신앙의 맥을 잇고 있다.
[참고 자료 : 간양리 본당터에 대하여, 한성준, 향토사학자, 2010.12]

◆ 간양리 본당 설립의 역사적 배경
내포(內浦) 지역은 충청도 복음 전파의 요람지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후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이후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고.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 1868년의 무진박해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어느 곳보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초기 교회사에서 유명한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박해를 피해 가며 전교 활동을 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선교사는 1836년 초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다. 또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합덕 일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눈 이후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된 선교사는 랑드르(Lanndre, 洪) 신부였다. 그러나 랑드르 신부가 황무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서 병사한 뒤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그 결과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가 신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에서. 위앵(Hum, 閔) 신부가 쇠재(현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가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881년부터 내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신부는 이들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이후 7∼8년 동안 합덕과 그 인근 지역인 고덕면·신암면·예산읍·당진읍 등에서 매년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드르니(현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리).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진말(현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 양촌(현 예신군 고덕면 상궁리)의 신자 공동체는 아주 주목을 받을 만한 곳이었다.
이에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신부는 두세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1890년 8월. 전해 6월 21일에 입국한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레오 1863~1935) 신부와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1866~?) 신부를 내포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때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에 거처하면서 충청도의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였고. 파스키에 신부는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다시 2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 중 합덕 븐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양촌 본당'(陽村本堂)의 퀴를리에 신부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인해 '간양골 본당'이 폐지되면서 이 지역을 통합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충청도 지역의 본당들을 분리해 나갔다.
반면에 퀴를리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그는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창말(倉里, 현재의 합덕 성당 자리)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이듬해 합덕 성당을 건립하였다.

◆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베드로, 1866~?) 신부
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1866년 10월 24일 스위스 몰(Maules)에서 태어났으며, 1885년 9월 15일 파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89년 7월 7일 서품을 받고 한 달 후에 출발하여 같은 해 10월 3일 조선에 입국한 뒤. 1890년 예산 간양골에 파견되었다. 그가 간양골에 거주하면서 충청도의 북쪽과 서쪽을 관할함에 따라 '간양골 본당'이 설립되었으나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 전쟁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서울로 피신해 온 파스키에 신부는 다시 충청도로 내려가지 않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어 1899년 4월 22일 공주(현 중동) 본당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04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그러나 지병으로 공주를 떠나 서울 주교관으로 갔다가. 여기에서 9월 24일 홍콩의 베다니아 요양소를 거쳐 프랑스로 귀국한 뒤 이듬해 파리 외방전교회를 탈회하였다.

■ 간양리 당간지주 [間良里幢竿支柱]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18
예산읍 간양2리에 위치한 이 당간지주는 백제 혜왕(A.D 598)때 창건된 간양사라는 절에 있었던 것으로 간양사는 150년전까지만 해도 법등이 밝혀졌다고 전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대원군시기에는 안동김씨와의 묘지 관계로 다툼 끝에 재판에 패하면서 절이 망했다고 하며 현재는 절터만 남아있다. 간양리 당간지주(間良里幢竿支柱)는 충남문화재자료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간(幢竿)이란 당(幢)을 매달아 두는 장대를 말하는데, 당이란 사찰에서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이를 알리거나 사찰의 종파를 알리기 위해 매달아 두었던 깃발을 말한다. 당간지주 또는 찰간지주(刹竿支柱)란 당간을 지탱시켜 주는 두 개의 버팀목으로, 빈 벌판의 석탑과 마찬가지로 옛 절터 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당간지주의 기본 형식은 사각형 기둥을 60∼100cm의 간격으로 마주 세운 뒤, 지주 사이에 사각형의 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원형 간대를 놓아 당간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간지주의 안쪽은 아무런 장식 없이 수직으로 세웠고,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중간에 간공이라 하여 2∼3개의 구멍과 꼭대기에 간구라는 구멍을 뚫었다.

■ 순교자
<간양골 병인정묘년 치명일기>

(1867년 예산 간양골에서 잡혀 순교하신 분들에 대한 기록이다. 1939년에 작성된 것으로 박의래(베드로, 1939년 당시 81세) 회장이 증언한 것을 누군가 대필한 듯하다. 박의래는 순교한 박안드레아 회장의 아들인데, 유 마태오와 자신의 어머니 박 루시아에게 들은 내용을 증언하였다. 당시 합덕 본당 주임인 페랭(Perrin) 신부가 확인하고 서명하였다. 기록의 원본은 공세리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고 내포교회사연구소에는 사본이 있다. 아래 내용은 현대문으로 수정한 것이다.)

"정묘년(丁卯年. 주: 1867년) 봄에 박해가 사방에 직면하여 교우들이 도처에서 잡힐 때, 충남 예산 간양골에 살던 당시 50세인 박 안드레아 회장은 홍주 원머리 양도민고 회장이 배교하고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집을 떠나 홍주 원머리 양 회장을 찾아가 여러 가지로 타이른 후, 양 회장과 유 서방(세례명 미상)과 김동(세례명 미상)을 대동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홍주 포졸들을 만나 예산 공서티 나루까지 같이 건넜으나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였으므로 무사히 집에 도착하여 양 회장 일행과 함께 영혼을 구하는 일에 대한 강론과 더불어 이 위험한 시기를 맞이하여 순교할 용기를 기르고 예비하던 중 뜻밖에 그 전날 길에서 동행했던 홍주 포졸들이 어디선가 알아보고 와서 박 회장과 위의 3인을 만나 포박하였는데 그 때 포박한 모습은 동아줄을 만들어 4인을 모조리 엮고 머리에는 각각 쇠갈을 씌워가지고 갔는데 그날이 정묘년 2월 13일이었다.
박 안드레아는 자기 아내 박 루시아에게 그 장래를 굳게 부탁하고 용맹히 작별한 후 홍주 영장에게 모든 문초와 국문을 당할 때마다 항상 교회 교리를 강론하였으며, 옥중에서는 다른 교우들에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것을 열심히 권면하시다가 가진 악형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결국 같은 해 10월에 유 서방, 김동, 양 도민고와 함께 얼굴에 백지(白紙)를 붙이고 물을 품어 죽이는 사형벌로 순교하셨다.
그분이 순교하신 후 그 아내 박 루시아는 신자가 아닌 자기 사촌과 함께 시체를 찾으러 홍주읍을 가보니 3-4인, 혹은 5-6인씩 모아모아 한 구덩이에 시체를 버렸는데 천신만고를 다하여 구덩이의 시체를 하나씩 둘씩 제쳐 놓아가며 찾는 중에 뜻밖에 한 줄기 피가 자기 몸을 스침을 깨달아 자세히 보니 자기 장부의 시체임을 발견하여 종이를 떼니 과연 자기 장부 시체였다 한다. 그리하여 간신히 운구하여 안장하니 구덕산(구덕산’인지 ‘舊 덕산’인지 분명하지 않다.) 가재울 뒷산이라. 그러나 그 산소는 그 후 잃어버렸다.
이상의 사실을 증명하여 인증한 자는 간양골 유마태오(사망)와 순교한 박안드레아의 미망인 박루시아(사망), 즉 본인 박베드로의 모친에게서 직접 들은 것을 증명합니다."
주소: 서산군 운산면 수평리 원골 공소
베드로 회장 박의래
[자료 : 내포교회사연구소]



■ 찾아 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지리좌표  [본당터] 북위 36°43′15.6″ 동경 126°53′58.1″
 [수철리 공소] 북위 36°42′65.3″ 동경 126°54′00.2″
 연락처  신례원 성당 (041) 334-7860, FAX (041) 335-0641
 홈페이지  없음
 미사시간  [신례원 성당]
 [평일] (월) 오전 6:30 (화수금) 오후 7:00 (토) 오후 4:00. 7:30
 [주일] 오전 10:00
 교통편  기차 : 용산역에서 장항선으로 신례원역까지 소요시간 1시간 40~50분 정도, 기차에서 내려 간양리2구를
 거쳐 산골짜기로 약 5km의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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