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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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16:03

여사울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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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출생지이며, 최초로 충청도 교회에 복음 활동을 펼친 곳
지역 충남 예산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출생지이며, 최초로 충청도 교회에 복음 활동을 펼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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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은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의 출생지이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 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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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여사울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이존창이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스승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 스코 하비에르) 형제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천주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 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호 星湖, 1681~1763)의 제자로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인 홍유한(洪儒漢, 호 隴隱, 1726~1785)도 경상도로 이주하는 1775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777년에는 이존창의 스승인 권철신과 이기양(李基讓, 호 茯庵, 1744~1802)이 여사울 이존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예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로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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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최초의 신부들인 김대건과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의 집안이 바로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였다. 단원 이존창은 한국 교회의 기틀을 잡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충청도는 그 당시 가장 큰 교세를 형성했고 충청도 신자들은 박해 때 전국으로 퍼져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존창 루도비코는 1786년 이래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이 조직한 가성직자단(假聖職者團, 模倣聖職者團)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고, 그해 말에는 여사울을 떠나 충청도 홍산을 거쳐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공주에서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였으나 그는 자유의 몸이 되자 자신의 잘못을 통회하고 더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에 들어갔다.
고향을 떠나 홍산으로 가서 전교에 열을 올렸으며 그 후 가성직 제도가 잘못된 것을 알고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입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다시 공주 감영에 끌려가 심문을 받고 서울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공주 감영에서 1801년 2월 28일(음)에 참수형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두러 갔을 때 여섯 번 칼질에 잘라진 목이 다시 굳게 붙었고 목에 실낱같은 흉터가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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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포(內浦)
내포란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한다. 즉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충청 북부의 수운(水運)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포구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했던 곳이었으며, 신흥 향반(鄕班) 세력이 성장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충청도에는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데, 특히 내포 지역에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하였다.  

◆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 )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성무를 집행했던 제도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인 1786년부터 1787년경까지 이승훈 베드로,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홍낙민 루가 등 10여명의 지도급 인물들이 약 2년간 신품(神品)을 안 받은 채 사제(신부)로서 미사성제를 드리고 고해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래 그를 북경으로 가게 했던 남인(南人) 학자 이벽, 세자 요한을 중심으로 권일신, 정약전 · 정약종 · 정약용 3형제, 이존창, 홍낙민, 유항검, 김범우 등 양반 및 중인 신분 사람들이 차례로 입교함으로써 창설된 한국 교회는 처음 서울 명례방(현재 을지로 2가)에 있던 김범우의 집을 집회 장소로 삼아 주일과 축일을 지내왔으나 그 때까지는 아직 이런 제도는 실시되지 않았다.
이 제도는 1785년 일어난 박해 즉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어 순교하고, 주도 인물이었던 이벽이 타의로나마 은거하게 된 뒤, 북경에 가서 직접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 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에 의해 교회 발전책으로 제의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유항검이 교리서를 자세히 연구하여 본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북경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의 이름으로 씌어져 1789년 10월(음), 권일신의 제자 윤유일을 통해 북경의 북당(北堂) 선교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승훈 등은 1790년 윤유일로부터 북당 선교사들의 회답을 받을 수 있었다.
이 회답에서 선교사들은 성사를 마구 집전한 것을 무지로 돌리고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정한 통회로써 구원을 얻도록 노력할 것이고, 구원의 가장 확실한 길은 성직자를 영입하는 것이므로 그 조속한 실현을 권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평신도들은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가 교회에 필요함을 비로소 인식하고 북경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윤유일을 다시 밀사로 북경에 파견하게 되었다.

■ 순교자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 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가 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순교자 김광옥 안드레아 (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출신의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았으나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그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60세 가량이었다.

◆ 순교자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년)  <하느님의 종 125위>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 때 곧은장에서 체포되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하다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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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36-10
 지리좌표  [예수성심상 앞] 북위 36°45′40.4″ 동경 126°49′43.8″ 
 연락처  신례원 성당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 25) (041) 332-7860  
 홈페이지  여사울 성지 http://www.yeosaul.or.kr/ 
 미사시간  평일 : 단체시 원하는 시간에 미사 가능
 주일 : 단체 신청시 주일 11시 반 가능
 * 여사울 공소에서는 월 1회 정도 미사가 있음 
 교통편  [승용차] 충남 예산읍 신례원에서 당진, 합덕 방면으로 이어지는 32번 국도를 따라 4㎞ 정도 가면 길
 좌측으로 이존창 생가 터 안내 푯말을 볼 수 있다.
 [기차/버스] 장항선 신례원역에서 하차한 후 합덕 방향 완행버스로 신종리에서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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