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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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성거산 동쪽 계곡에 있던 박해 시대 사목 중심지이며 순교자들의 본당
지역 충남 천안

성거산 동쪽 계곡에 있던 박해 시대 사목 중심지이며 순교자들의 본당


성거산 순교 성지에는 소학골 교우촌 유적지가 있다. 신유박해 이후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은 한때 칼레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던 곳이다. 소학골 교우촌은 천안 일대 여러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박해 때에는 신자들이 은신하여 신앙생활을 하던 삶의 터전이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교우촌이다.성거산 묘소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있는 소학골은 병인박해 전부터 있었던 교우촌이다. 목천의 소학골(쇠악골 또는 씨앗골) 교우촌은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 독립 기념관 뒤편의 흑성산 가까이 있는 성거산의 동쪽 계곡이다.
소학골 출신 유명 순교자는 1866년 음력 11월 8일 교수형으로 공주 감영에서 순교당한 최천여(1812~1866, 베드로), 최종여(1825~1866, 라자로) 형제와 배문호(1843~1866, 베드로), 고의진( ?~1866, 요셉), 그리고 채 서방의 며느리( ?~1866)다.


성거산 자락의 깊은 산중에 신자들이 정착하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면서 소학골에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척박한 골짜기에서 움막을 짓고 생활하거나 화전을 일구어 얻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신앙만은 잃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이 깊고 높은 산중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덕골(서덜골)과 소학골 교우촌은 산자락과 골짜기로 이어지는 진천 백곡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소학골 교우촌은 한때 칼레(Calais, 姜, 1833~1884, Adolphe)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했던 곳이다. 1864년 칼레 신부는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가 사목 관활 구역을 조정하면서 경상도 서부에서 충청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비교적 건강이 좋은 칼레 신부에게 위임하였다. 그리하여 소학골은 칼레 신부의 여름 휴식처요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학골에 박해의 풍파가 몰아쳐 신자들이 풍비박산하여 도망하였으나,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 칼레 신부의 복사를 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등은 교우촌에 남아 있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즉시 이들을 공주로 압송하였고, 4명 모두 공주 영문의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1866년 12월 14일(음 11월 8일)에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의 시신은 한 신자가 거두어 소학골에 안장하였다. 그 후에도 소학골에서는 다시 몇몇 신자가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이곳의 교우촌(공소) 이름이 한국 교회사와 관련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병인박해(1886년) 이후인데, 그중 소학동 만이 박해 때 기록에 보일뿐 나머지 교우촌 이름은 1880년대 가서야 등장하고 있다. 성거산 일대의 교우촌(공소)은 교회측 기록에서 모두 7개로 나타나지만, 실제는 5개였다고 한다. 1910년 이후 먹방이, 서덕골, 매일골 공소는 석천리 공소로, 소학동, 사리목 공소는 도촌, 납안리 공소로 통합되었다. 이 곳 성거산 일대의 공소를 설립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  성거산 주변의 교우촌 설립 현황과 순교자
○ 서덕골(목천면 송출리) : (1884년, 두세 신부): 최양업 신부의 백부 거주지
○ 먹방이(목천면 석천리) : (1884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가 128명:  
○ 소학골(북면 납안리) :  (1888년, 두세 신부) 공소 신자수 114명: 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나자로, 최 안드레아, 배화첨 베드로, 배명중 바오로, 배문호 요한, 배 안드레아,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
○ 매일골(목천면 송출리) : (1895년, 퀴를리에 신부)  
○ 사리목(북면 납안리) : (1901년, 드비즈 신부) : 순교자 배문호 무덤 소재지
○ 석천리(목천면 석천리) : (1913년, 공 베드로 신부) 112명  
○ 도촌(북면 납안리) : (1919년, 공 베드로 신부) 110명
○ 납안리(북면 납안리) : (1920년, 공 베드로 신부) 51명

■ 순교자

최천여 베드로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며 묵상, 염경기도를 부지런히 하고 늘 치명 원의를 자주 말하더니 병인년 10월 10일에 포졸에게 잡혀 관청에 들어갔다. 천주학을 믿느냐는 질문에 믿는다고 하니 배반토록 권유당했다. 그러나 듣지 않자 다시 투옥, 옥중에 들어가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를 살기 위하여 배반을 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병인년 십일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55세였다.

최종여 라자로
최천여 베드로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그 형과 함게 열심히 수계 생활을 하더니 병인년 10월 10일에 목천 포교에 잡혀 혹독한 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교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으로 가 형 베드로와 같이 11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42세였다.

배문호 베드로와 고 요셉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 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을 다하였다.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아내와 의논하고 뜻을 지키며 강 신부가 준 철사띠를 주야로 띠고 강 신부에게 나아가 고신 극기하는 법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초파일에 목천 포교에게 고 요셉과 함께 잡혀 관가에 들어가 배주배교를 강요 받았다. "만만코 죽사와도 배반치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배문호는 십계명을 풀어 이야기하니 "그것을 누구에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은 다하지 못했나이다" 하자 즉시 하옥 2차, 3차 물고문에 형벌이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천주 배반하라 명하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과와 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 외우기에 자신만만하더라.
11월 초파일 공주로 끌려가며 경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양을 보고 즉시 통회하고 자원으로 따라와 공주 진영에 함께 들어갔다.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로 나이는 2살 차이라고 하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며 성가를 불렀다고 하였다. 모진 형벌을 받았으나 도무지 굴하지 않자 즉시 옥에 하옥,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니 배문호 24세이었고 요셉은 26세였다. 배문호는 모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 오소서. 또  이르오되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를 꽂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이 동곳을 보시며 생각하고, 나와 고 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이들의 순교 후"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사는 강치운이가 찾아 묻었느니라" 하였다.

최천여의 며느리
치명일기에 '채 서방 며느리'로 나와 있는데 최근 최천여의 며느리임이 밝혀졌다. 다만 "배문호와 한가지로 치명하였다 하더라"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소재지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 성거산 성지 뒷편
 지리좌표  [소학골 터] 북위 36°51′48.0″ 동경 127°14′00.8″ 
 연락처  성거산 성지 사무실 (041) 584-7199 FAX (041) 584-7189
 홈페이지  성거산 성지 http://sgms.zerois.net/
 미사시간  [성거산 성지]
 평일 : (화-토) 오전 11:00,
 주일 : 오전 11:00 
 교통편  [승용차] 천안IC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우회전하여 단국대병원을 지나 계속 직진, 성거를 지나 입장삼
 거리에서 상장교차로 방향 150m지점에 성거산 성지 대형 입간판이 보인다. 우회전 하여 계속 직진하여
 산 정상에 주차장이 있고 성거산 성지라는 간판이 있다. 제2 줄무덤에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약 1km
 가면 소학골 교우촌 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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